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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폴리스로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디트뉴스 2011-08-18] '不狂不及 제대로 미쳐야지'-이승완 대표

probee 2016-07-07 조회수 4,247
        <인생의 지표가 된 사람들>

그의 선친(先親)은 고(故) 이득향 선생. 이 선생은 국가고시에 합격한 약사였다. 일제 치하, 서울에서 화장품 회사를 세워 자수성가도 이뤘다. 이 선생은 1남 5녀의 셋째로 태어난 그에게 돈의 소중함을 얘기하곤 했다. 기업가 정신은 온전히 선친에게서 배운 셈이다.

제5대와 7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고(故) 우홍구 선생은 그의 자형(姉兄)이다. 우 선생은 야당 정치를 30년 이상했다. 그의 선친은 외아들을 그런 자형에게 맡겼다. 어릴 적부터 서울 유학생활을 했다. 서슬 퍼런 박정희대통령 시절, 그의 자형은 야당정치를 독립운동 하듯 했다. 자형에게는 몸에 베인 지조 같은 게 있었다. 자형의 모습에서 소년은 우직스러움을 배웠다. 자형은 배워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소리도 지겹도록 했다. 사업하면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 이유는 온전히 자형의 가르침이다.

그가 인생의 지표로 삼는 또 다른 인물이 있다. 바로 오유진(88) 전 충북대 약대 교수다. 오 박사는 국내 건강보조식품 연구의 권위자다. 그는 회사를 세우면서 오 박사를 고문으로 영입했다.

오 박사는 국내 학계에 프로폴리스(propolis)를 처음 알린 주인공이다. 부인의 만성질환을 프로폴리스로 치료한 뒤 프로폴리스 건강복음운동을 펼쳐왔다. 충북대 보건진료소 소장 재직 시 환자들에게 수많은 임상을 하기도 했다.

선친과 자형, 오 박사를 인생의 스승으로 모시고 사는 그는 이승완(56) 사장이다. 그는 프로폴리스에 미친 사람이다. 프로폴리스에 홀려서 서울프로폴리스란 회사를 세웠다.

     <건강기능식품업계에 족적을 남기다 >
이 사장은 국내에 건강기능식품 두 가지를 처음 알렸다. 그가 처음 국내에 가공식품으로 알린 건강보조제는 알로에다. 그는 이연호 전(前) 회장이 남양알로에(지금의 유니베라)를 세울 때 창립멤버였다. 창립멤버 정도가 아니고 창업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게 그였다. 이 사장은 이 전 회장의 알로에농장을 남양의 새로운 먹을거리로 생각했다. 남양알로에는 창립 5년 만에 매출 500억 원 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런 인연으로 현재 서울프로폴리스의 임원 중 3명이 남양알로에 출신이다.

그는 39세에 상무로 승진했고, 그 이듬해인 1992년 서울프로폴리스의 전신인 서울알로에를 창업했다. 그가 학술대회를 통해 프로폴리스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건 1995년이다. 호주나 뉴질랜드에서 관광 상품으로 간혹 들여오던 게 전부이던 시절이다. 갖은 우여곡절을 겪은 뒤 그는 프로폴리스에 승부수를 던졌다. 2003년 한국원자력연구원 창업보육센터(BI)에 서울프로폴리스가 닻을 올렸다.


<“프로폴리스에 미친 사람” >
그는 건강기능식품을 패션에 비유한다. 기능식품은 스콸렌, 효소, 알로에, 인삼 등 패션처럼 유행을 탄다. 어떤 종류는 사람들의 뇌리에서조차 가물가물하다. 이렇게 유행을 타는 건 뿌리가 없기 때문이란 게 그의 생각이다.

그에게 뿌리란 R&D(연구개발)고 과학적 근거다. 작은 기업을 경영하는 그지만 바이오프로폴리스연구회를 주도적으로 설립해 회장을 맡아오고 있다. 2년마다 세계프로폴리스 사이언스포럼도 개최한다. 기초과학 연구 성과를 실용화하는 일을 기업 스스로 하는 셈이다. 국제포럼이니 자연의학 심포지엄 같은 데 왜 돈을 쓰느냐는 비아냥거림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지 오래다. 프로폴리스에 미쳐도 단단히 미친 사람이다.

    <창업과 함께 찾아온 좌절 >

야심차게 원자력연구원에 둥지를 틀었지만 창업과 함께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로폴리스를 건강기능식품으로 허가를 받으려면 추출 용매인 에탄올(주정)을 1도 이하로 사용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서울프로폴리스는 주류제조업이 되는 상황이었다.

또 하나는 대덕연구개발특구 안에서는 식품제조업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프로폴리스 사업을 하려면 주류제조업과 식품제조업 두 가지 허가가 필요했던 셈이다. 뜻하지 않게 2년간 개점휴업 상태가 돼 버렸다.

이 두 가지 기준을 가지고 허가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야 했다.

    <1%의 가능성을 찾아 헤매다 >
이승완 사장의 집무실에 걸려 있는 수안 스님의 '무사(無事)'. 정형화되지 않은 틀 속에 자신을 담을 수 있는 여백의 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그가 설명했다.
1%의 가능성을 찾아 오유진 고문과 함께 무작정 일본으로 갔다. 도쿄역 부근의 대형서점에서 ‘생물 항암 물질 생복합 프로폴리스’란 책을 발견했다. 책은 세계 최초의 생물환원기술제법(HAE) 수용성 프로폴리스 추출기술을 소개하고 있었다. 저자는 중국의 오진산 박사.

오 박사를 만나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 넓은 중국 땅에서 겨우겨우 만난 사람은 ‘오진산’이 아니고 ‘왕진산’이었다. ‘왕’을 일본식으로 ‘오’로 표기해 빚어진 해프닝이었다. 왕 박사는 중국의 프로폴리스 제품 창시자였고, 세계적인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는 이 사장에게 기술이전료로 100만 불을 요구했다. 한국 돈으로 10억 원 정도 되는 큰돈이었다.

1%의 가능성은 결국 자체 개발뿐이란 결론에 이르렀다.

하지만 수입 한 푼 없이 회사를 운영하고 있던 이 사장에게 연구비는 지나치게 큰 부담이었다. 준비하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고 했던가. 중기청의 ‘산학연 공동기술개발컨소시엄’ 과제를 소개받았다.

이 사장은 원자력연 조성기 박사팀과 손을 잡고 ‘천연항산화제 고기능성(프로폴리스) 제조의 신 추출 공정 개발’을 2년 만에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1억여 원의 연구비로 중국에서 개발한 생물환원기술제조법보다 순도가 높은 무알콜 수용성공법(WEEP)을 개발했다. 국내 프로폴리스 액상제품 1호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 >
2004년 7월 23일, 건강기능식품업계에 큰 이변이 일어났다.
에탄올(주정)로 만든 프로폴리스는 주세법 적용을 받는데, 세관에서 에탄올이 함유된 외국산 프로폴리스를 밝혀 내 수 년 전 수입한 제품까지 주세와 가산세를 추징했다. 영세한 수입업자들이 줄도산 위기에 처했다. 수입업자들이 이 사장을 찾아와 살 길을 물었다. 한국양봉협회와 공동으로 프로폴리스를 주류로 분류한 현행법의 부당성을 정부에 건의한 게 이 사장이다. 결국 정부가 이를 받아들여 국내 프로폴리스 산업이 활성화되는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1%의 가능성도 없었던 여러 일들이 기적 같이 해결되는 걸 체험했어요. 간절히 원하는 기도가 강력한 힘을 가진다는 피그말리온 효과가 나에게도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또 다시 찾아온 좌절 >

과학적으로 입증된 효능과 인체시험 등에 대한 언론보도가 잇따르면서 서울프로폴리스의 앞날은 전도양양해 보였다. 특히 국내 최대의 다단계 회사였던 제이유네트워크와의 독점계약은 큰 행운이었다. 첫 발주가 25억 원이었다. 실험실공장인 탓에 한 달 최대 생산량이 2억 원을 넘기지 못하는 게 한이었다. 2005년 창업 3년, 영업개시 1년 만에 매출이 10억 원을 돌파했다. 장밋빛 청사진도 잠시, 제이유네트워크 주수도 회장이 구속 수감됐다. 1년 매출이익을 고스란히 날리는 신세가 됐다.

이 사장은 13년간 경영하던 서울기능식품(옛 서울알로에)을 정리하고 서울에서 대전으로 혼자 거처를 옮겼다. 구조조정과 긴축경영이 시작됐다. 매출은 반으로 줄었고, 직원들도 하나 둘씩 직장을 떠났다. 허들경기를 뛰는 것처럼 장애물을 하나 넘으면 또 다른 장애물이 나타나는 세월이었다. 이렇게 2년을 보냈다.

     < 다시 승부수를 띄우다 >
이승완 사장은 <조선문학> 2009년 12월호에 당선작을 내며 등단한 수필가이기도 하다. <조선문학>에 다수의 수필을 발표했다.
마케팅 전쟁에서는 자금과 인력이 최대 무기다. 벤처기업이 작은 역량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전선(戰線)을 좁히고 전략을 잘 짜야한다. 이 사장은 새로운 승부수를 띄웠다. 프로폴리스 치약과 양식용 어류 항생제 개발에 착수했다. 좋은 제품보다 잘 팔리는 제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서다.

치약은 대기업이 차지하는 시장을 뚫기보다는 빈틈을 노렸다. 휴대용 50g 중량에 프로폴리스의 구강에서의 항염(抗炎)과 항균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기능성 치약이었다. 양식용 어류 항생제는 마침 중기청의 기술혁신 개발 사업에 선정됐다. 2008년부터 식약청이 동물사료에 화학항생제 사용을 전면 금지한 것도 호재였다. 프로폴리스는 천연 항생제가 아니던가!

    
    <서울프로폴리스의 <경영정신>. 고객존중, 지식공유, 자연추구. >
치약은 지역 자치단체장들을 첫 고객으로 삼았다. 이들은 ‘프로비 치약’의 마니아가 돼 움직이는 광고탑 역할을 지금도 해 주고 있단다. 기관과 기업에서 판촉물로 대량으로 구입해갔다. 그런 영향으로 치약은 한 해 10만개가 입소문으로만 판매되고 있다. 양식용 어류 천연 항생제 ‘프로폴리스 아쿠아’는 세계 최초로 개발돼 전남 영광과 나주의 장어양식장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나주의 만강식당은 ‘프로폴리스 장어요리’ 메뉴를 국내 첫 소개하기도 했다. 신제품 개발로 시장이 차츰 넓어지기 시작했다.

“대각연후지대몽(大覺然後知大夢). 맹자가 말씀하시길 큰 깨달음 뒤에 큰 꿈을 이룰 수 있다고 했습니다. 큰 역경을 겪고 났더니 더 큰 꿈을 생각하게 됐지요. 저보고 미쳤다고들 합니다. 작은 회사 하면서 세계 학술포럼 하느라 돈을 써댄다는 거죠. 우리가 가진 수용성 프로폴리스 기술이 세계적 수준이란 걸 외국에도 널리 알리기 위한 일입니다. 세계 1위의 도전, 결코 꿈이 아닙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칠 정도의 열정이 없다면 어찌 뜻을 이룰 수 있을까. 그의 꿈이 닿을 듯이 가깝게 느껴졌다.

☞서울프로폴리스는?     한국원자력연구원과 공동으로 프로폴리스 수용성 연구를 진행하고, 이를 사업화하기 위해 세워졌다. 특구법에 따라 출연연구기관이 20% 이상 기술출자를 하게 되면 연구소기업이 되는데, 이 회사는 원자력연구원 연구소기업 2호다. 수용성 프로폴리스인 ‘프로비’와 ‘프로비 치약’, 양식용 어류 천연항생제인 ‘프로폴리스아쿠아’, ‘프로비’ 화장품 등을 생산한다. 이들 제품은 전국 40여 대리점이나 인터넷을 통해 판매된다디트뉴스 8월 18일자에 이승완 대표의 사업가로서의 정신과 창업에서 한국원자력연구원 연구소기업에 이르기가지의 애환의  기업경영 스토리가 실렸다.

이후 내용은  <http://www.dtnews24.com/news/articleView.html?idxno=94835>을 통해 전문을 볼 수 있다.

이충건기자